미국 남북 전쟁(1861-1865) 초기에는 자원하는 지원병으로 군대를 조직하였으나,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지원병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브라함 링컨이 이끄는 미국 정부는 연합세력에서 벗어난
11개의 주를 대항하는 군대를 보강하기 위해 군대 징병법을 제정하였다.

재림교회는 징병제도로 인해 군대에 부름을 받은 형제들을 권면해야 할 방법을 결정해야 하였다.
이와 같은 군대 징병법은 교회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당시 정부는 헌법으로 양심적인 이유로
전쟁이나 전쟁무기를 들지 않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비전투원이 될 수 있는 길과 300불을 지불하면
대체 군인을 보충할 수 있는 해택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등록된 종교 단체들에게 주어진 법이었다. 그리하여 그 때까지 교회를 조직하는 일에 주저하던
지도자들은 화잇 선지자의 권면을 받아들여 1863년 비로소 교회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300불을 지불하는 대체 군인법은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는 실정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비무장 전투원의 혜택은 조직된 종교 단체에게는 허용되었다. 이와 같은 국가의 혜택들은
교회가 본래에 가졌던 신앙원칙(평화주의)을 변경시키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 때에도 핍박보다는 타협이 더 무서운 사단의 무기임이 입증되었다. 오늘날 타협의 결과는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어 있는 그분의 백성들이 이 난처한 전쟁에 가담할 수 없음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모든 신앙상 원칙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그들은 진리에 순종하면서 동시에
상관들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거기에는 계속적으로 양심을 어기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1권 361.

이와 같은 경험은 군대나 전쟁에 참여해본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은 그 사실을 시인할 것이다.
역사는 당시 교회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헌법가운데 양심적으로 무기를 드는 일을 반대하거나 규율과 믿음의 조항으로
이런 행위를 금하는 종교 단체들을 위해 비전투원으로 참여하도록 해주었으나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아직 이런 법 앞에 어떤 입장도 내놓을 수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법인 단체가 아니었던 것이다.”-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기원과 역사, 1권, 322.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적은 무리들에게 징병법은 큰 두려움과 고통을 가져왔다.
그들은 비전투원의 신조를 가졌으며, 그들의 믿음의 깃발은 안식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의 어떤 것도
군대에서는 존중될 수 없었다.”-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기원과 역사, 1권, 322.

“1861년 그들은 그들의 첫번째 조직과 출판소를 등록하였으며 미시간주에 첫번째 총회 또한 형성되었다.
그 다음 해에 7개 주의 합회가 형성되었으나 대총회가 조직된 것은 전쟁 중이었던 1863년도였다.
조직의 가치는 교회의 내부 일뿐만 아니라 외부 관계에서 금방 드러났다. 만일 조직된 교회가 없었더라면
정부에 하나의 집단으로 알려질 수 없었으며 따라서 비전투원의 원칙을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기원과 역사, 1권, 323.

“헌법 가운데 또 다른 방도로 만일 비전투원이 300달러를 ‘감면세’로 지불한다면
정부는 교대 군인을 보충하기로 하였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이 아니었던 많은 이들이
이 계획을 받아들여졌으며,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군대에 가지 않도록 자금을 일으키기 위해
대중적으로 기부금을 받았다.”-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기원과 역사, 1권, 324.

나라에 대한 국방의 의무는 시편 121편의 말씀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