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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백성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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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명예와 칭찬을 받고 일반사람들보다 뛰어난 인기를 누리기 위하여서는
비록 고난과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개의치 않고 그 희생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비난과 조롱을 받는 일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옳고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난색을 표현한다.
독특한 백성이 된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칭찬과 명예를 얻기 위하여 독특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비난과 조롱을 받는 독특한 백성이 되어야 하기에 참으로 믿음이 아니면 그 길을 가기가 어렵다.
이 세상의 유행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품위와 단정함을 고수하는 일은 참으로 이 세상의 독특한 백성으로 조롱과 비난이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안전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안전은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으로 서는 것이다. 우리는 이 타락한 시대의 습관과 유행에
한 치도 양보하지 말고 도덕적으로 자립하고 그 부패한 우상숭배의 관습과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5증언, 78)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웃의 이교국들과 맺은 동맹은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들이라는 그들의 신분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이 금하신 사람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그들의 악한 행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세속과 친분을 맺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도 잃고 처음 사랑도 잃게 된다.
무엇인가 이득을 보기 위해서 자신을 팔아버린 결과는 실망이요 영혼을 잃는 것뿐이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경험은, 힘을 얻기 위하여 세상을 향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모든 사람들의 경험이 될 것이다.
능력 많으신 하나님을 버리는 사람들, 모든 힘의 근원을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세속과 친분을 맺고 그 속물들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그들도 도덕적 능력이 약화될 것이다.”(화잇주석, 렘 17:5)
이스라엘이 이방과 동맹을 맺으므로 그들의 풍습과 행위를 본받아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으로서의 특성을 상실해 버렸다.
오늘날도 세상의 유행을 따르므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은 사라지고 첫 사랑을 잃어 버린 채 그리스도께 대한 관심은 식어져 버린다.
그 결과 교회는 세상과의 경계선은 희미하여지고 독특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선한 특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한 백성으로서 우리가 어떤 우상을 갖고 있는지를 스스로 살펴보아야 할 때가 왔다.
이때야 말로 양의 목자들이 하나님의 파수꾼으로서 충실하게 일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옷과 말과 태도에 있어서 세상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리뷰 1899. 3.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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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백성들의 의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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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의 신을 통해서 볼 때 재림선도들의 옷차림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의 유행을 따르지 말아야 할 것과 가능한 한 안식일 예배를 위한 특별한 예복을 따로 마련해 두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선지자의 권면을 들어보자.
“애굽에서 나온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인들과 구별하고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옷깃에 단순한 푸른 리본을 달도록 명령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저들이 입는 옷에 어떤 특별한 표시를 하라는 요구를 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보면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본으로 참고하도록 지시하신 말씀들을 찾아볼 수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는 옷에 관하여 뚜렷한 지시를 말씀하셨다면
오늘날 이 시대에 사는 당신들의 백성들이 입는 옷에 관하여서도 어떤 주의의 말씀을 주실 것이 아닌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어떤 점이 저들의 옷에 나타나야 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귀중한 보물과도 같은 당신의 백성들은 저희가 입는 옷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 아닌가?
또한 저들은 옷 입는 점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의 모본이 되고 저들의 단순한 스타일이
자랑과 허영과 사치성 및 쾌락을 사랑하는 세상 사람들을 견책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점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교만을 견책하셨다.
이와 반면에 사치와 의복에 대하여 쉴 새 없이 논평하면서 저들 자신의 차림새에 대해서는 전혀 부주의하고 더러운 옷차림이 마치 하나의 미덕이 되기나 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때때로 바람에 날릴 듯하고 속이 훤히 비치는 초라한 옷을 입고 다니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저들의 옷은 언제 보아도 더러우며 사치를 책망하는 말을 하고 다닐 것이다.
저들은 단정하고 말쑥한 맵시도 사치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만약 저들이 시내산에서 들려오는 율법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인 군중들 속에 있었다면
“의복을 빨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중들에게 쫓겨났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반포하신 십계명은 무질서하고 더러운 습관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 거할 수 없을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저희 의복을 빨지 않았을 경우 거룩한 율법의 선포를 감히 들을 수 없었거든 하물며 몸과 의복과
저희가 사는 집을 깨끗하게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거룩한 율법이 기록될 수 있을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저들의 신앙 고백이 하늘을 치솟을 듯이 고상한 성질의 것인지는 몰라도 저들의 실제적인 생애는
지푸라기보다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저들의 감화는 불신자들을 구역질 날 정도로 불쾌하게 할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들의 대열에 남아 있지 않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집은 그러한 신앙 고백자들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께 경배드리기 위하여 안식일에 모이는 모든 신자들은 가급적 단정하고 몸에 잘 맞으며 예배드리는 집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
저들이 다른 옷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내내 농장에서 일할 때 입던 옷을 안식일에 그대로 입고 나오는 것은 안식일과 하나님과 교회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안식일을 주님의 거룩한 날이라고 공언하는 다른 신자들에게 욕을 돌리는 행위이다.
만약 진심으로 안식일의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존귀하게 하고 싶으나 바꾸어 입을 옷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여유가 있는 다른 신자들이 그에게 안식일에 입을 옷을 한 벌 기증하여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집에 나타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의복에 있어서 보다 동일성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
비싼 의복이나 여분의 장식품을 사들이는 데 돈을 지출할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작은 극기의 정신으로 순결한 신앙심을 나타낼 수 있으며 오히려 자기 자신은
단순한 옷을 입고 과거에 긴요치 않게 지출하던 돈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자매들을 도와 단정하고 우아한 옷을 사서 입게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교훈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분리되어야 한다고 하여 신자들은 옷차림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해야 한다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 믿는 자매들 가운데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안식일에 하나님께 경배드리기 위하여 성도들의 집회에 나타날 때
일주일 내내 저들이 쓰고 있던 “썬보넷”(Sun-bonnet-여자용 해가리개 모자)을 쓰고 평일에 입던 옷을 입고 나오는 자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의복 문제에 대하여 이런 부류의 자매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이 있다.
저들은 옷에 먼지와 흙이 묻고 심지어는 찢어진 곳이 벌어진 그대로 지저분하게 걸쳐 입고서 안식일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난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어떤 친구와 만날 약속이 있어서 나갈 때
저들은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하여 자기에게 있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그 자리에 나타날 것이다.
세상의 친구들은 만약 상대방이 머리를 빗지 않고 더러운 옷을 되는대로 입고 나타날 경우 저들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은 안식일을 당하여 지존하신 하나님께 경배드리기 위하여 교회에 나아갈 때 아무렇게나 입고 머리도 매만지지 않고
되는대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몸과 의복이 보여 주는 그대로 존경심과 경건한 정신이 결여된 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면접하는 장소가 되고 하늘의 천사들이 참석하는 교회에 나가게 된다.
저들의 전체적인 모습은 저희 자신의 품성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내용은 옷 입고 자랑하려 한다는 것이다.
저들은 단정함, 기호 및 질서 등을 허영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이러한 불쌍한 영혼들은 의복에 대한 저들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저희의 대화, 행동 및 저들의 대인 관계 역시 같을 것이다.
저들은 가정에서나 다른 형제들과 세상 사람들 앞에서 부주의하고 때때로 저속한 태도를 보일 것이다.
그 사람의 입은 옷과 몸가짐을 보면 대개 그 남성이나 그 여성의 인격의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옷을 함부로 입고 그 매무새가 단정치 못한 사람들은 고상한 내용의 대화를 하는 경우가 드물고
저들의 감정은 거의 세련되어 있지 않다. 때때로 저들은 괴팍하고 조잡한 것을 겸손한 것으로 잘못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으로 상징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의 구원하는 감화력이 없이는 이 세상은 자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의복과 몸가짐에 부주의하며 사업 거래에 정확하지 못한 자칭 그리스도인들의 부류를 바라볼 때
저들의 의복이 보여 주는 그대로 거칠고 예모가 없으며 태도가 단정치 못하고 대화의 내용이 저속하다.
이와 동시에 저들은 어처구니없는 특성들을 참된 겸손과 신앙적인 생애의 표시라고 믿고 있다.
만약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계셨다면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인가 상상해 보라.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고상한 내용의 대화를 해야 하며 비굴할 정도로 어리석은 아첨을 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예모있고 친절하며 인정이 많은 정신을 가져야 한다.
저들이 하는 말은 성실하고 진실한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
또한 저들은 저희 형제들이나 세상 사람들과의 대인 관계에서 성실하여야 한다.
저들이 입는 의복 역시 사치와 과시(誇示)를 피해야 하며 어디까지나 단정하고 야하지 않은 것이어야 하며 우아하되 건전하고 기호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
특히 거룩한 안식일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 관하여 신령한 관심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의복에 특별히 유의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오해받지 않을 정도로 분명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 부주의하고 태만했던 사람들이 진리로 말미암아 생활이 고상하게 성화되고 단정한 습관을 지키며 의복에 있어서
건전하고 기호에 맞는 것을 택하여 입을 때 그러한 신자들의 감화는 열 배나 더할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어떤 면에 있어서든지 혼란과 불결함과 죄와 같이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옷을 입는다고 하여 저희 자신을 너무 돋보이게 하려고 애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저희가 신앙과 분수에 알맞게 우아하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옷을 지어 입는다면 저들은 유행을 따르지 않게 될 것이며
세상을 닮기 위하여 저희 옷 모양을 바꿔서도 안 될 것이다.
비단 모든 세상 사람들이 저들과 다를지라도 바른길을 따르기 위하여 고결한 독립성과 도덕적인 용기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세상이 소개하는 드레스 스타일이 점잖고 편리하면 건강에 도움이 되고 성경의 원칙에 일치하는 것이라면 그런 옷을 입을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의 관계를 변화시키거나 세상 사람들로 그런 드레스 스타일을 본받게 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는 옷을 입어야 한다.
저들은 극단적인 것들을 피해야 한다. 저들은 칭찬이나 비난에 관계없이 겸손한 정신으로 똑바른 길을 따라가야 하며
보람이 있는 바른 원칙을 고집해야 한다.”(2기별, 473-477)
이 글을 읽고 있는 남녀들은 이 시대에 가장 적절한 기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은무리 가운데서 정확한 진리의 말씀들이 생애에 나타나기를 기대하신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 그리고 교만에 대하여 죽지 않는다면 이 사업을 끝마치는 일의 일부를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우상에 빠져 있을 때에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수 없으시다.
그 우상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품어져 있거나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성경과 예언의 신을 통해 주어진 신성한 훈계의 말씀을 경히 여길 때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유행의 여신을 숭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주어진 교훈의 말씀에 주의를 두지 않는다면 에브라임 지파에게 임했던 “그들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는
운명의 선언이 우리에게도 임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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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의 숭배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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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초기 때부터 유행의 여신은 그의 열렬한 숭배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시대에는 이방나라들로부터 타락한 유행이 전래되어 왔으며 다음 세대에서도 이것은 사회의 타락과 불경을 초래하는 주 요인이 되어 왔다.
오늘날의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도 고대 조상들과 같은 유행을 많이 찾아 볼 수가 있으며 이것들은 방탕과 우상숭배를 몰고 사회 속에 침투해 들어왔다.
이방민족들의 전형적인 관습들은 많은 장신구들로 머리를 꾸미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퍼머하거나 주름을 넣어 땋는등 이런 것들인데
이 모든 것들은 이방의 신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로 간주된다.
춤은 이방나라로부터 전래되어 왔는데 우상숭배적인 축제 때에 한 중요한 일부분이었으며 항상 잔치가 동반되었다.
여인들은 몇몇 옷가지만을 걸치거나 벌거벗은 채 공중 앞에 나타났고 그 결과 모든 도덕적 타락이 그 축제의 뒤를 이었다.
이방민족들의 이러한 풍습들이 조금씩 조금씩 유대민족의 통치자들, 왕족들, 성직자들, 그리고 왕들에 의해 유대나라에도 전래되기 시작했다.
출애굽 역사의 초기 때에도, 우상숭배자들의 풍습인 춤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행해지는 것이
묵인되었을 때 무서운 결과가 뒤따랐던 사실을 우리는 찾을 수 있다.
모세의 부재동안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했던 시내산에서의 배도가 명백한 한 예이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고전 10:7-8)
우상 숭배자인 이세벨은 유행과 꾸미는 일에 모본이 될 수 있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이르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왕하 9:30)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 것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왕상 21:25-26)
이스라엘의 포로 된것과 그들의 배도의 가장 큰 이유는 이방 유행을 받아들인 연고였다.
"또 사자를 원방에 보내어 사람을 불러오게 하고 그들이 오매 그들을 위하여 목욕하며 눈썹을 그리며
스스로 단장하고 화려한 자리에 앉아 앞에 상을 베풀고 내 향과 기름을 그 위에 놓고"(겔 23:40-41)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너의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렘 4:30)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약 칠백여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인들의 생활을 타락으로 인도하는
이방민족들의 풍습과 유행에 관한 엄숙한 기별을 가지고 오셨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사 3:14-23)
세상의 유행에 굴복하도록 하는 유혹을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자들도 접할 것이며
옛 조상 이스라엘의 믿음의 배가 난파당했던 것과 똑같은 경험을 많은 자들은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많은 면에서 유대민족의 역사를 되풀이 하는것처럼 우리앞에있는 위험은 유대민족이 가졌던 위험보다 결코 적지 않다.
또한 유행에 관한 위의 경고는, 믿음으로부터 떠나는 죄를 지은 안식일 준수자들에게 특별히 적용된다.
"이사야 3장의 예언이 이 마지막 때에 적용되는 것으로 내게 제시되었다.
외모와 과시만을 생각한 시온의 딸들에게 다음과 같은 책망이 주어져 있다. 25절을 읽어 보라.
“너희 장정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나는 이 성경절이 철저하게 성취될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면서 그리스도인 경험을 하지 않고, 무거운 짐을 지지 않고
개인적 책임을 느끼지 않는 젊은 남녀들은 시험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티끌 가운데서 낮아지고, 그들이 얻지 못한, 하나님의 사물들을 경험하고자 갈망하게 될 것이다.
전쟁이 곧 터지려고 합니다. 아, 하나님! 이제 당신의 백성들을 지켜주소서."(1증언, 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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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세상 유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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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유대교회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악에 둘러 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불경한 풍습들과 유행이 유대인들 중에 만연하였다. 로마인들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동안의 역사는 부도덕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의 유행을 좇는 유대 여인들은 방탕한 로마인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은 이 절박한 위험을 보고 행동거지에 관한 몇 가지 법을 만들었고 검소한 옷차림, 단정한 머리,
그리고 다른 보호조항들을, 그리스도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리스도 여인들은 행동거지에 있어서 모본이 되어야 함과 검소한 옷차림, 순결한 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교육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럴 때에 그들의 성품은 추하고 도덕적 타락으로 둘러싸인 세상 중에서 현저한 차이를 나타날 것이었다.
사람에게는 자신이 영향력 있는 중요한 인물이 되길 바라는 본능이 있다.
이것은 과시와 허영을 통해 만족을 느끼는, 교만에서 비롯된 욕구이다.
세상 유행은 그의 열렬한 숭배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떠나도록 이끄는 그릇된 사상을 심는다.
유행의 마력에서 벗어나기는 매우 힘들며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승리를 얻을 수가 있다.
마음이 복음의 능력으로 꼴 지어 있을 때 본성은 바뀔 것이고
남녀들은 “이전에 좋았던 것은 싫어지고 싫었던 것은 좋아지” 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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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구 착용과 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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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만이 경건한 여인들에게 주어진 성경의 지혜로운 충고들에 대하여 감사할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교훈들이 지켜질 경우 기쁨과 평화가 생애 가운데 있게 될 것이고 선행이 잇따를 것이다.
행동과 품행에 관한 명백한 원칙들이 초대 그리스도교 남녀들에게 주어졌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벧전 3:3-6)
"우리는 하나님을 순종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관습에 맞출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돈을 섬길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정반대로 걸어가면서 마음의 평안과 하나님의 인정을 얻을 수 있는가?"(4증언, 644)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일치되고자 하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금과 진주와 값진 성장(盛裝)으로 단장하는 일에서 세상의 관습과 일치되는 데 대하여 망설이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착용하기에는 너무도 양심적인 사람들은 마음이 좁고, 미신적이요, 심지어 광신적이라고까지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교훈들을 우리에게 주기로 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것들은 무한한 지혜를 가진 하나님이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무시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위험과 손실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금지된 장신구들을 고집하는 자들을 마음속에 교만과 허영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주목을 끌고자 욕망한다. 그들의 의복은, 나를 쳐다보라, 나를 칭찬하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사람의 본성 속에 선천적으로 존재한 허영은 방종을 통하여 꾸준히 증대해 간다.
마음이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자 고정되면 사람의 쓸데없는 모든 장식은 사라진다."(4증언, 644-645)
유행과 자기 과시를 위한 옷차림은 많은 그리스도인 여인들의 기도와
성경을 연구하는 시간을 빼앗아 갔고 그들의 생각과 정성은 우상에게 바쳐진바 되었다.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유행의 경배자들은 등한히 한 영혼을 상기해야 한다.
화장하는 데 낭비한 모든 시간은 지성을 황폐해지도록 버려둔 데 대해 그들을 책망할 것이다.
그리하여 생애의 모든 목표와 목적을 향상시키고 고상하게 해 줄 개혁이 있게 될 것이다"(4증언, 643-644)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시간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명하신다. 기도하며 깨어있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거울을 들여다 볼때마다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기록하는 천사가, 기도하며 성경을 공부해야 할 시간에
자신을 꾸미고 치장하는 일에 소비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 여인들이 간과하고 지나쳐 버리는 또 다른 거울이 하나 있는데,
그 거울은 하나님의 율법의 거울이다. 이 거울은 성품의 한점의 흠이나 점까지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거울을 바라봄으로 아름다움을 가꾸어야 한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3-25)
지상 성소에서의 물두멍은 여인들이 사용하던 거울을 가지고 만들어 졌는데 이것은 성직자들이
거룩한 곳에 들어 갈 때마다 혹시도 구주께 불명예를 끼칠지도 모를 부정과 더러움을 씻는데 사용되었다.
초대교회가 은혜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남에 따라 그 아름다운 영향은 어디에나 스며들어 있었다.
암흑의 어떤 세력도 이 일을 막을 수 없었다. 박해와 결핍 그리고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복음의 사자들을 낙담시키거나 방해할 수 없었고 그들의 목적을 이루는 일을 막을 수 없었다.
초대교회의 선구자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성실하지 못한 무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리하여 구주께서 과거에
인도하셨던 그 길을 잊어진바 되었고 반만 회개한 이교도들이 교회에 합류하도록 문이 열렸다.
"이교의 관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양보와 순응주의적 정신은 교회가 이교 아래서 견뎌낸 맹렬한 박해로 말미암아 한동안 방지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박해가 그치고 그리스도교가 왕궁 안으로 들어가게 되자,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의 겸손한 단순성을 버리고
이교의 제사장이나 방백(方伯)들의 교만과 허식(虛飾)을 따르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의 이론과 유전으로 대체시켰다."(쟁투, 49)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명목상으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부유한 이교도들이
교회 내에 받아들여짐에 따라 교회는 시기와 편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유한 사람들이 영광과 존경을 받을 때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은 경시를 받았고 심지어는 압박을 당하기도 하였다.
사도 야고보는 그 당시 교회 내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상태를 이렇게 언급하셨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약 2:2-6,9)
회개하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교회 내에 받아들임으로 교만과 과시가 초기의 단순성과 함께 뒤바뀌어져 버렸다.
금반지를 끼는 것은 세상의 부유한 사람들의 풍습이었다.
이 풍습이 교회 내에 들어오도록 허용한 것은 교회의 원칙과 제약을 버린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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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화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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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여인들의 우상이다.
눈썹을 뽑거나 루즈를 바르는 일, 립스틱, 손톱에 색칠하고 윤을 내는 일 등 지나친 모든 화장은 건강을 해치는 일이며 유행이라는 우상제단에게 예배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사단의 무서운 매개체 이다.
머리나 얼굴, 손, 피부 등을 보호하기 위해 기름이나 다른 간단한 미용을 위하여 사용하는 그것을 질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참된 아름다움은 밖에서가 아닌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깨달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화장을 함으로 그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건강에 해를 끼친다.
얼굴이 뜨거워 지면 이 화장품은 땀구멍을 통해 피부를 속으로 스며들어 혈액에까지 미친다.
이 일을 통해서만도 많은 자들의 생명이 희생당해 왔다.” 건강한 생애 798
"여성들은 피부의 티를 가리기 위해 화장을 하지만 심장의 건강을 느낄 수 있는 홍조를, 그들의 얼굴에서 되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피부를 거무죽죽하게 하고 어둡게 하는 이것은 우리의 영성마저도 어둡게 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평화와 기쁨을 앗아간다.“ ID 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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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신자들의 의복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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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하는 집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외모에 있어서 하나님을 매우 불쾌하시게 하고 있는데 그들이 입고 꾸민 목적이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적 치장과 화려한 장식들 그리고 세상유행으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이켜
세상을 동경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매우 불쾌하시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의 말씀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생각의 주제가 되고, 예배드리는 자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엄숙하고 거룩한 예배에서 마음을 빼앗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건 하나님께서는 불쾌히 여기신다.
나비 넥타이와 리본, 주름 가장자리 장식과 새의 깃털, 금, 은의 장신구 등은 일종의 우상이며,
모든 예배자들의 눈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아야 할 거룩한 하나님의 예배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5증언, 499)
"나는, 밖으로 나타난 모습은 마음의 상태를 보여 주는 일임을 보았다.
외부에다 리본과 깃과 쓸데없는 것들을 달고 있을 때, 그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속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런 사람들이 그들의 부패에서 정결해지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1증언, 13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원하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누구나 이 거룩한 훈계에 따를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세상 속에 섞여 살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들 중에서 나와 따로 있고”라고 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간직해야 한다.
이 말은 세상의 풍습과 습관들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모자나 옷을 사야할 필요성을 느낄 때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과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좋은 영향을 끼치든지 혹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모두는 자신이 선택하는 일에 하늘의 지혜를 내려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고 자신의 감정이나 점원의 달콤한 말에 맹목적으로 끌리지 않고
오직 굳은 원칙을 따르겠다는 결정을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에 너무 보잘것없는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주님 앞에 내어 놓으라 그분께서 좁은 길을 보이시리라’고 말씀 하셨다.
이 의복에 관한 주제는 특히 여성들에게 매우 골치 아픈 주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남편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의복 개혁에 관한 올바른 성경상 원칙을 알지 못하거나
그 중요성에 있어서 마땅히 깨달아야 할 만큼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성품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보다는 외적인 화려함과 유행을 더 좋아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관해 큰 책임이 있는데 성경의 원칙들을 가르치지 않고 방임하여 둠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입도록 허용한 까닭이다.
시대 시대마다 권고의 말씀은 신자들에게 주어졌지만 이 문제는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이미 세상유행이 교회 안에 들어와 둥지를 틀었던 것이다.
성경과 예언의 신에 의한 명확한 기별과 경고를 신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우리 모두는 부인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대개의 경우 지도자들의 부인이나 딸들이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자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세심한 주제이니만큼 조심스럽게 다루라는 지도를 받아왔고
이것은 신자로서의 시금석이 아니므로 결정하는 일은 개인들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훈계 받아왔다.
이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의복에 관한 중요성을 주장해 왔으나
큰 저항을 받았을 뿐이었고 오히려 극단자라는 오명과 함께 그 문제는 매우 불유쾌한 주제가 되어 버렸다.
아래의 말씀들은 왜 목사들이 교회의 신자들로 올바른 표준 위에 서게 하는 일에 실패하는지 잘 나타내 보여준다.
"유행에 대한 순종이 우리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들에게 파급되어 있으며,
다른 어떤 세력보다도 우리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는데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나는 우리 교회의 규율들이 매우 불충분함을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금지되어 있는, 의복에 나타난 모든 교만의 전시는 교회의 징계를 위한 충분한 이유가 되어야 한다.
경고와 호소와 권유를 받으면서도 왜곡된 뜻을 여전히 따르고자 고집한다면 그것은 마음이 그리스도와 결코 동화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간주될 수 있다.
자아, 오직 자아만이 숭배의 대상이며, 그렇게 공언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은 많은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가게 할 것이다.
한 백성으로서의 우리에게 하나의 무서운 죄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교인들에게 그들의 믿음과
일치되지 않는 방법으로 옷을 입도록 허용한 것이다. 우리는 즉시 일어나서 유행의 유혹에 대하여 문을 닫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교회들은 타락하게 될 것이다." 4증언, 647-648
"교역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의무와 잘못에 대하여 강력하게 증거 하였으나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배우자가 증거 된 그 바른 기별로 경고 받을 필요가 있으므로, 그 책망은 큰 비중을 가지고 그들에게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우자들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끌어내리도록 허용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손해를 보고, 그들의 유용성과 영향력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실망하고 낙담하지만, 그 손해의 참 근원을 깨닫지 못한다. 그 근원은 가정과 연결되어 있다."(1증언, 138)
"성화 되지 않은 아내는 교역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저주이다. 가정에서 이같이 쇠퇴하게 하는 영향을 불행하게도 받아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상황에
처해있는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의 기도와 각성을 배가시키고, 확고하고 단호한 위치에 서서 이 어두움이 그들을 압도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확고하고 단호해야 하며, 그들의 가정을 잘 다스리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천사들의 보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생애를 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헌신하지 못한 배우자들의 욕망에 굴복 당하면,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이 그 집에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이 배우자들의 잘못을 묵인하고 지지해 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궤는 그 집에 머물 수 없다."(1증언, 139)
"나는 교역자의 아내들이 활동을 통하여 남편들을 도와주고, 그들이 발휘하는 감화력에 대하여 세심하고 주의깊어야 할 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목을 받고 있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기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복은 본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생애와 대화는 모본이 되고 죽음의 냄새보다는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되어야 한다.
나는 그들이 겸손하고 온유하면서도 고상한 위치에서야 하고, 마음을 하늘로 향하지 않게 하는 것을 그들의 대화의 주제로 삼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어떻게 내가 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며,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중대한 질문이 되어야 한다."(1증언, 139)
다음의 영감의 말씀을 주의깊이 읽어보자.
"나는 다음의 성경 말씀을 보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천사는 '그 말씀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1증언, 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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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개혁의 필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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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이제 의복개혁의 필연성에 대하여 더 이상 변명과 구실들을 말하지 말아야 하겠다.
나그네와 순례자로 자처하는 재림성도들이라면 엄숙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겸손해 져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교만이 교회안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일 때문에,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이 분리되고, 법궤가 그들에게서 떠나갔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들 가운데 있는 교만과 유행과 세상과의 일치에 대하여 잠든 상태가 되어 있다.
그들은 다달이 교만과 탐심과 이기심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어서 발전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진리로 감동을 받게 되면, 진리가 세상에 대하여 죽게 해줄 것이며, 그들은 리본과 레이스와 깃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은 상태가 되면, 불신자들의 비웃음과 조롱과 멸시도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처럼 세상에서 분리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자랑과 유행과 습관을 본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불멸의 유업을 얻기 위한 고상한 목적이 그들 앞에 언제나 있게 될 것이다.
미래에 대한 이런 기대가 세속적 성격에 속한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분리되고 구별된 한 백성을 소유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세상의 유행을 즉시 뿌리뽑아 버리지 않고 본받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되면,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고자 하신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녀들이요 흑암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세상과 같아지고자 하는 욕망의 표로써 애굽의 파와 마늘을 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옷 입었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사실상 그분을 벗어버리고,
그들이 은혜와 상관없는 자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과 낯선 처지에 있는 자들임을 보여 준다."(1증언, 136-137)
"교회가 세워졌을 때 이런 것들을 가르치지 않고 버려 두면, 목사는 그의 의무를 등한히 했으므로
그가 보급되도록 허용한 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이다."(5증언, 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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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책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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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신성한 훈계를 통하여 세상의 유행과 짝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매우 큰 죄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분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매우 명백히 알 수 있다.
이 말씀들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왜 이렇게 곧은 진리의 말씀들이 저항을 받아왔는가" 라고 물을 것이다.
왜 많은 자들이 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그리도 무지 상태 가운데 있었던가? 누가 이 일에 책임이 있는가?
앞에서 말했듯이 가장 큰 책임은 양떼들을 위임 맡아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악한 종은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견해를 비웃지도 않았다.
그러나 행동과 말로써 또는 마음속으로 주의 오심이 지체되리라고 선언한다.
그는 주께서 빨리 오시리라는 확신을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지게 한다.
그의 영향으로 사람들을 외람되게 하고 부주의하게 하며 지체하도록 한다.
그들은 세속적인 무감각 속에 굳어져 있다.
세상 정욕과 부패된 사상이 저희 심령을 점령하고 있다.
악한 종이 주객과 같이 먹고 마시며 향락을 추구하는 일에 세상과 연합하고 있다.
그는 그의 동료 종들을 때리며 저희 주님께 충성스러운 자들을 비난하며 정죄한다."(소망, 634-635)
"한 백성으로서의 우리에게 하나의 무서운 죄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교인들에게 그들의 믿음과 일치되지 않는 방법으로 옷을 입도록 허용한 것이다.
우리는 즉시 일어나서 유행의 유혹에 대하여 문을 닫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교회들은 타락하게 될 것이다."(4증언, 648)
"그들은 마음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시켜야 한다.
외적 장애와 내적 장애로 더불어 싸우는 투쟁이 있을 것이다.
애착의 과업은 물론이요 괴로운 분리의 과업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려면 교만, 이기심, 허영, 세속적인 것, -모든 형태의 죄-를 이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생애는 그처럼 통탄스럽게도 어렵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그처럼 변덕스럽고, 그처럼 가변적인 이유는 이 간직된 우상들로부터
먼저 그들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고 그들 스스로를 그리스도께 결합시키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5증언, 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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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 후보자와 의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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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의 후보자들과 신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반드시 훈계를 받아야 한다.
침례후보자들이나 신자들은 아래의 말씀의 요구들을 잘 주의해 보기 바란다.
"새로 믿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가르침을 받아야 할 문제들 중 하나는 의복에 관한 것이다.
새로 회심한 자들을 성실하게 다루도록 하라. 그들은 의복에 있어서 허영적이 아닌가?
그들은 마음의 교만을 품고 있지 않는가? 의복의 우상은 도덕적 질병이다. 그 질병은 새 생애로 옮겨져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 복음의 요구에 순종하게 되면 의복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가 요망될 것이다."(6증언, 96)
세상 유행은 교회를 타락시키는 일에 가장 힘 있는 대리인이 되어왔고 오늘날의 배도의 큰 책임은 바로 이 유행에 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은 의복 개혁의 기별을 전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준비시킬 기별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다.
그동안 잘못된 철학들과 개인들의 견해에 의해 가려져 왔던 귀중한 진리가 참된 빛으로 제시해야 할 때가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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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옷을 입는 현대의 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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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의 여신”의 숭배자들은 유행이 바뀔 때마다 맹목적으로 그를 따라가고 있다.
세상에 포로 들을 이끄는 교만과 자만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공언하는 많은 남녀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약 일백여년전 미국에서는 건강에 해롭고 성가신 것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의 옷이 전해졌는데
이것이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입혀졌다. 짧은 치마, 남자 스타일의 옷들이 바로 이때에 전해졌다.
이것이 구식 스타일의 유행을 개혁시켰고 점점 더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때 미국의 한 풍습으로 알려진 이러한 유행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이러한 혁명이 일어난 때부터 사람들의 이상과 도덕적 표준에 변화가 찾아 왔고 모든 여성들은 남자들의 유행을 받아들였으며
심지어는 세상 사람들뿐만이 아닌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내에도 이 유행이 침투해 들어왔다.
그러한 제멋대로의 옷차림들, 그리고 오늘날에는 청바지들이, 새로운 스타일로 유행이 되고 있다.
이렇게 옷들이 만들어 짐으로 남녀사이에 구별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사단은 그러한 유행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들을 이용해서 세상의 남녀들뿐만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자들까지 무너뜨리고 혼란을 주려고 하고 있다.
옛날 이러한 옷차림에 대해 꾸짖기 위해 그리스도인들과 안식교인들이 사용했던 성경은 오늘날 우리에게 읽히고 있는 이 성경과 같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주제에 관해서는 침묵이 지켜지고 있는 것 같이 보이며 타락해 가고 있는 이 악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은
마음이 좁고 심지어는 광신자로까지 불리어지고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걸어야 할 ‘좁은 길’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신 22: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소위 개혁 의복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것은 얌전하고 겸손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전혀 적합하지 않은 불건전한 의복이다.
여자들이 그들의 의복과 모습에 있어서 가능한 한 이성과 유사해지고자 하고, 그들의 옷을 남자들의 옷과 흡사하게
만들고자 하는 경향이 더해 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증한 일이라고 선언하신다."(1증언, 421)
그리스도인 남녀들의 의무는, 하나님의 분명하고 명확한 말씀이 지시되었던 것처럼 이 문제에 관한 확고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법은 곧 성경의 법이고 이 점에서 떠난다고 한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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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개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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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초창기 때에 자매들의 예복에 관한 특별한 훈계가 엘렌지 화잇여사를 통해 주어졌다.
이 옷이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훈계가 주어졌다.
옷은 검소한 색상이어야 하고 편해야 하며 특별히 계절에 잘 맞아야 한다.
그 당시 유행했던 옷들처럼 너무 길어서 거리의 먼지를 다 끌고 다니는, 매우 성가시고 건강에도 좋지 않았던
이런 옷보다는 훨씬 짧은 치마를 입어야 할 것이다. 이런 옷은 아래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이런 유해한 유행들 중에는 빈번히 몸을 보기 흉하게 노출시키는 큰 버팀테가 있었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버팀테와 질질 끌리는 스커트 없이 지낼 수 있고, 사지를 적당하게 감싸주는 산뜻하고, 온당하고,
적당한 의복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의복의 개혁은 의복을 짧게 하고 사지를 감싸주는 것 이상을 의미하였다.
그것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온갖 종류의 의복이 포함되었다.
그것은 스커트를 어깨에 매달므로 허리가 그 무게를 받지 않게 했다.
그것은 폐와 위와 그 밖의 내부 기관들을 압박하고 척추의 굴곡과 거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질병들을 야기하는
팽팽히 당기는 코르셋을 제거했다. 의복의 개혁은 육체의 모든 부분의 보호와 발달에 알맞게 공헌했다."(4증언, 635)
"개혁된 의복의 장점을 깨닫고 교만과 유행에 반대되는 위치를 즐거운 마음으로 취하여 그것을 시종일관 적용한 자들에게는 축복이 입증되었다.
적당하게 만들어졌을 때 그것은 잘 어울리고 모순 없는 의복이었으며 솔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심지어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장려되었다."(4증언, 635)
이 옷은 그 당시 대다수의 자매들에 의해 거절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시험해 오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자매들이 그들의 성향을 따름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교만을 드러낼 수 있도록 의복에 관한 증언이 진정되게 하셨다.
개혁된 의복이 추천된 것은 세속적인 현상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로 유행을 따르지 못하도록 방어하기 위해 이 의복이 필요했다는 생각을 경멸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에 교만을 품고 있다는 것과,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그대로의 것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허락하셨다.
개혁된 의복이 가하는 제한이 그들에게 필요했다는 것이 이제 드러났다."(4증언, 639-640)
"증언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이들은 주어진 빛을 등한히 하며 살고 있다.
의복 개혁에 대해 어떤 이들은 크게 무관심하며, 다른 이들은 조소을 보내는데
그 이유는 이 일에는 십자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를 인하여 나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들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분리시키는 일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의복 개혁은 고대 이스라엘에 청색 리본이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응답한다.
교만하고, 저들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킬 신령한 진리에 대해 전혀 애정을 갖고있지 않는 이들은 이 사실을 저들의 행실을 통해 드러낸다."(3증언, 171)
고대 이스라엘은 그들의 지도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절하고 다른 나라들과 같이 되기 위해 한 왕을 세워달라고 부르짖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안식일 교인들도 특별히 도안된 이 의복을 거절함으로 순결과 단순성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거절하였다.
구주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지만 그들이 쓴맛을 경험하고 시험을 받도록 홀로 두셨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표준에 도달할수 있도록 하기 위한 끊임없는 훈계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과 유행에 매료당할지도 모를 매혹의 땅을 걷기를 더 좋아했다.
우리의 자매들에게 주어진 이 이상적인 모본이 거절되고 따돌려졌으므로 몇 년 후 아래와 같이 또 다른 두 번째 계획이 제시되었다.
"만일 우리의 모든 자매들이 적당한 길이의 단순하고 장식 없는 의복을 입었다면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일치는 하나님께 훨씬 더 기쁨이 되었을 것이며,
4년 전에 제시된 다양성보다 훨씬 더 건전한 영향을 세상에 미쳤을 것이다.
우리의 자매들이 일반적으로 개혁된 의복을 마땅히 착용해야 할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덜 반대할 만한 다른 형태의 것이 지금 나타나 있다.
그것은 쓸데없는 주름이 잡히지 않고, 맨 겉에 입는 스커트를 동이지 않고 뒤로 매지도 않았다.
그것은 헐렁한 웃옷이나 품이 넉넉한 블라우스와 스커트로 되어 있는데, 스커트는 거리의 먼지와 진흙을 피할만큼 충분히 짧다.
재료는 큰 무늬 형태의 것이 아닌 평범한 색깔의 것이어야 하고, 짧은 의복에서처럼 사지를 감싸주는 동일한 주의가 주어져야 했다."(4증언, 6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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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하고 산뜻한 옷차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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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옷차림에 관해서 선지자는 아래와 같이 언급하셨다.
"의복은 우아하고, 아름답고, 단순한 자연미에 조화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생애의 자랑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셨지마는, 우아한 것과, 자연미에 대하여는 경고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들에 핀 꽃들, 꽃망울을 터뜨린 순결한 백합화를 가리키시면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9)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처럼 천연계의 사물들을 통하여 우아하고 단순한 것과 순결하고 조화로운 것이 하늘에서 귀하게 평가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과,
우리의 의복이 그렇게 될 때 그분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설명하신다."(치료, 288-289)
“그분께서는 외적의 어떤 장식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값진 온유와 겸손으로 영혼을 입히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ID 289
"예수님의 순수한 신앙은 이를 따르는 이들에게 인위적이고 거짓된 것보다는 단순한 자연미와 자연스러운 고상함과 수준 높은 순결성 등을 요구한다."(3증언, 375)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다르게 옷을 입음으로써 스스로를 유별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고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의복을 정숙하고 건전하게 입는데 관한 의무감을 따름으로 그들이 유행에 뒤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을지라도
그들은 세상과 같아지기 위하여 그들의 옷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런 경우에는, 온 세상이 그들과 다를지라도 그들은 바르게 설 수 있는 고상한 자립성과 도덕적 용기를 나타내야 한다.
만일, 세상이 성경과 일치되게 점잖고 편리하고 건전한 모양의 의복을 소개한다면,
그와 같은 스타일의 의복을 입는 것이 하나님이나 세상과의 관계를 바꾸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들의 의복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극단을 피해야 한다. 그들은 칭찬이나 비난에 개의치 말고, 겸손하게 솔직한 태도를 취하고,
그것이 옳기 때문에 올바른 길을 고수해야 한다."(1증언, 458-459)
"신앙은 저급한 것이며, 성경의 표준을 자신의 생애의 규율로 받아들이는 것은 죄인에게 생색을 내는 것이라는 인상을 너무 자주 마음 속으로 받게 된다.
그들은 신앙적 요구는 세련되지 못하고, 이를 수용할 때 아름다운 것을 찾는 취향과
그것을 즐기는 일을 멀리해야 하며, 그 대신에 수치와 저질적인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단의 기만 중 이것보다도 더 큰 기만은 없다."(3증언, 374-375)
"우리는 한 백성으로서, 유행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세상에서 떠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의복에 대하여 산뜻하고 단순하고 점잖고 안락한 계획을 가지고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대로
의복을 입고자 한다면,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기 위하여 이 의복의 형태를 바꾸어야 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기 위하여 우리의 의복을 괴상하고 독특하게 할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함으로 세상이 우리를 멸시할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그들의 의복은 산뜻하고 점잖아야 하고, 그들의 대화는 고상하고 경건해야 하고,
그들의 행위는 흠이 없어야 한다."(1증언, 424-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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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것을 피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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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극단으로 인도하는 것은 언제나 사단의 목적이었다.
길고 무거운 옷으로 보도를 끌고 다니던 옷차림이 무릎을 간신히 가리는 옷차림으로 치달았다.
"개량된 의복의 적당한 길이에 관하여 많은 자매들이 질문하는 편지에 대한 회답으로서,
나는 우리 미시간주 지역에서는 마루에서 약 9인치 정도 떨어지는 획일화된 길이를 택하였음을 말하는 바이다.
나는 너무도 많은 편지에 대답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 질문에 대답하는 바이다.
사실상 나는 이미 말을 했어야 하지만, '건강 개혁자'지에서 이 점에 관하여 무엇인가 분명한 언급이 있기를 기다렸다.
나는 획일화된 길이를 진정으로 권유하고 싶기 때문에, 9인치라면 인치로써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나의 견해와 거의 유사하다고 말하는 바이다."(1증언, 521)
"그러나 우리들의 의복은 아담하고 단순하면서도 품질이 좋고 색깔이 어울리며 일하기에 적합한 의복이어야 한다.
화려한 것보다 질긴 감으로 만들어진 의복을 선택하여야 한다.
따라서 의복은 보온과 몸을 적당히 보호하는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
잠언서에 지혜있는 여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집 사람을 위하여 두려워하지'(잠 31:21) 않는다고 하였다."(부모, 302-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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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의 색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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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 때의 모든 만물은 인류의 이익과 즐거움을 위해 창조되었다.
오감을 통해서 인간은 그가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하여 감사하고 또 이해할 수 있었다.
죄를 짓기 전 모든 만물은 아름다웠다. 시각을 통하여 인간은 가장 놀라운 우주의 심비를 이해할 수 있었고
창조물 가운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한두 가지 색상밖에 볼 수가 없어 모든 만물이 다 같은 색상이고 매우 단조로워진 우리의 생활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만약 하나님께서 자연계를 많은 색상들로 아름답게 장식하셨다면
왜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많은 장신구들과 색상들로 아름답게 꾸며서는 안 되는가 하고 질문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들의 색상은 모두 자연적인 것이다. 사람을 입히는 모든 색상들은 인공적인 것들이다.
구주께서는 자연계를 매우 아름답게 만드셨는데 그렇게 함으로 인류가 그의 즐거움을 동경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인공적이고 외적인 장식이 아닌 그분의 추종자들의 품성이 그분의 품성과 같이 꼴지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로 예표 된 우리들은 아래의 말씀들을 잘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의복을 검소하게 입으라고 가르친다.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라'(딤전 2:9).
이 말씀은 옷의 과시, 찬란한 색깔, 사치스런 장식 등을 금하고 있다.
입는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시키거나 칭찬을 받기 위하여 고안된 의복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한 아담한 옷에서 제외된다."(치료, 287)
"그러나 우리의 의복은 검소하고 단순하면서도 질이 좋고, 색깔이 조화롭고, 일하기에 적합해야 한다.
의복은 과시보다는 내구성(耐久性)을 위하여 선택되어야 한다.
그것은 따뜻하게 해주고 적당하게 보호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치료, 288)
부모들은 한 아이에게 다른 아이들보다 더 아름다운 옷을 사주는 편견으로 다른 아이들로 하여금
그 아이에 대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잘못을 범한다. 이것은 교만과 자만을 불러일으킨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고대에 야곱이 요셉에게 준 선물을 한 예로 볼 수가 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창 37:3)
비록 요셉이 자만심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시련이 그 뒤를 따랐다.
그의 형제들은 여전히 질투심에 불타 있었고 비통한 죄를 지음으로 그들의 일생동안 그 고통을 겪어야 하였다.
입은 사람에게 잘 어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는 그러한 색상의 옷들은 질책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색상의 조화가 매우 요란스럽거나 큰 꽃무늬, 요란한 빗금 무늬등은 복음의 단순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특히 예배하는 집에서나 우리의 진리를 소개하는 일에 있어서 옷의 색상은 검소하고 단순해야 하며 우리의 기별의 가치를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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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에 좋은 옷차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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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마다 건강에 해로운 유행이나 미신의 관습 등의 풍습이 있다.
중국에는 몇 세기동안 여성들의 발이 자라는 것을 막아서 그들을 약하게 만들고자 하는 풍습이 있었다.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는 여자들이 어릴 때부터 큰 고리를 사용해 그들의 목을 차츰차츰 늘리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들의 발전을 막기 위한 같은 방법이 그들의 다리에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풍습들은, 자신들의 일생을 희생하고서라도 자연 가운데 발전하고 그들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하는 사상들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오늘날의 여성들은 이러한 일들은 무지의 결과이고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코르셋을 이용해
자신의 복부를 압박하고 둔부에 무게를 더하므로 엄청난 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속옷 끈을 바짝 죈다고 해서 몸매가 아름답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미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균형미로서 신체 각 부분에 조화된 균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육체적 발육을 위한 정확한 모델은 불란서의 의상가들이 전시해 보이는 모양들 속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연계 가운데 보이신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계발된 인간의 형체에서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아름다움의 창작자이시며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이상에 순응함으로써만 참된 아름다움의 표준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부모, 305)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나는 주의 영에 의하여 경건을 공언하는 나의 자매들에게 행동의 단정과 그에 어울리는 얌전함과, 염치와 정절을 지키라고 권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다.
이 부패한 세대가 따르는 자유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표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2증언, 459)
“소박함”이란 말을 주의깊게 살펴보자.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순수함' 그리스도인 여성들에게 사도바울은 이러한 훈계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 여성들은 검소함으로 너희 자신을 꾸미고'. 오늘날 여성들의 옷차림에 나타난 천박함, 무례함 등은 세상의 타락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구주께서는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셋째 천사의 기별로 우리를 불러 내셨고 그들과 구별되어 따로 있기를 바라신다.
"우리 자매들은 가장 아담한 의상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 저들은 단순한 스타일의 옷차림을 해야 한다.
그대들의 모자나 드레스에 요란스런 주름장식들을 달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대들은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속 사람을 단장한 하나의 산 표본을 나타내 보이라.
우리 자매들은 단순한 옷을 지어 입어야 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오래 견딜 수 있는 질긴 감으로 옷을 만들되 아담하며
이 시대에 어울리는 것이어야 하고 의복 문제가 마음을 사로잡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전도, 2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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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꽉 죄이는 레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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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마다 건강에 해로운 유행이나 미신의 관습 등의 풍습이 있다.
중국에는 몇 세기동안 여성들의 발이 자라는 것을 막아서 그들을 약하게 만들고자 하는 풍습이 있었다.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는 여자들이 어릴 때부터 큰 고리를 사용해 그들의 목을 차츰차츰 늘리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들의 발전을 막기 위한 같은 방법이 그들의 다리에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풍습들은, 자신들의 일생을 희생하고서라도 자연 가운데 발전하고 그들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하는 사상들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오늘날의 여성들은 이러한 일들은 무지의 결과이고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코르셋을 이용해
자신의 복부를 압박하고 둔부에 무게를 더하므로 엄청난 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속옷 끈을 바짝 죈다고 해서 몸매가 아름답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미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균형미로서 신체 각 부분에 조화된 균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육체적 발육을 위한 정확한 모델은 불란서의 의상가들이 전시해 보이는 모양들 속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연계 가운데 보이신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계발된 인간의 형체에서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아름다움의 창작자이시며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이상에 순응함으로써만 참된 아름다움의 표준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부모, 305)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나는 주의 영에 의하여 경건을 공언하는 나의 자매들에게 행동의 단정과 그에 어울리는 얌전함과, 염치와 정절을 지키라고 권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다.
이 부패한 세대가 따르는 자유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표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2증언, 459)
“소박함”이란 말을 주의깊게 살펴보자.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순수함' 그리스도인 여성들에게 사도바울은 이러한 훈계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 여성들은 검소함으로 너희 자신을 꾸미고'. 오늘날 여성들의 옷차림에 나타난 천박함, 무례함 등은 세상의 타락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구주께서는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셋째 천사의 기별로 우리를 불러 내셨고 그들과 구별되어 따로 있기를 바라신다.
"우리 자매들은 가장 아담한 의상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 저들은 단순한 스타일의 옷차림을 해야 한다.
그대들의 모자나 드레스에 요란스런 주름장식들을 달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대들은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속 사람을 단장한 하나의 산 표본을 나타내 보이라.
우리 자매들은 단순한 옷을 지어 입어야 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오래 견딜 수 있는 질긴 감으로 옷을 만들되 아담하며
이 시대에 어울리는 것이어야 하고 의복 문제가 마음을 사로잡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전도, 2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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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머리장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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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단장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많은 관심을 가져왔고
유행이 급변하고 있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는 더욱 더 그리하다.
모든 상상해 낼 수 있는 장식이란 장식, 과시적인 디자인과 모양, 머리카락을 염색하는 일 모두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유행에 그리스도인 들을 유혹하려는 사단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다.
남자와 여자를 구별할 수 없는 머리 모양들, 동양인과 서양인을 구별할 수 없는 머리카락의 색상들, 남녀를 막론하는 귀 거리를 사용하는 일,
현란한 각가지의 머리카락의 색깔들은 오늘날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있다.
노랑머리로 물들인 소년이 눈을 감고 기도하는 모습이 이상하기보다는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이미 교회 깊숙하게 유행은 또 다시 둥지를 틀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머리단장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실된 그리스도인은 유행과 성경에서 말하는 단정함의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시대에는 여성이 공중 앞에 나갈 때에는 얼굴을 가리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 관한 기사에 보면 여성이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여성은 풍습에 따라서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창 24:65절참조)
그러나 수건을 가리는 목적은 오늘날과 같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유행과는 다른 것이었다.
여성 특유의 신중함과 겸손의 상징이었다.
이 풍습은 아랍민족과 이슬람 민족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머리를 가리는 풍습은 천주교회에 의해서 받아들여졌고 다른 종교들에게도 온유와 겸손의 상징으로 사용되어왔다.
비록 우리는 이러한 머리를 가리는 풍습을 받아들이거나 권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정신은 본받을 만한 것이다.
그리고 그 풍습을 대신하여 사도 바울은 가장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을만한 모습을 성경에 기록하였다.
오늘날뿐만 아니라 머리를 단장하는 문제는 초대 그리스도교회 시대에도 대단한 관심사중에 하나였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4-7)
성경에는 머리를 단장하는 문제들을 영적인 것과 결부한 것을 보게 된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 말씀을 보면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고 여자는 오히려 무엇을 쓰지 않고 기도하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 하셨다.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그렇다면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을 때에 머리를 욕되게 한다는 말은 곧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머리단장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임이 확실하다.
다시 말해 유행의 여신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이 움직이며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에게 욕을 돌리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상에서 유행하는 머리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확고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 추천할 수 있는 머리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인가?
진실되고 거룩함을 좇으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에서 어렵지 않게 이상적이며 단정한 모습의 모델을 찾아낼 수 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고전 11:13-16)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세상의 유행과는 관계없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본받아야할 경건한 모델을 발견하게 된다.
남자는 짧은 머리
여자는 긴 머리
어떤 이들은 이유를 들어 반론을 제기 할는지 모른다.
예수님도 긴 머리였고, 그것은 구원에 관계가 없고 등등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씀은 이모든 반론에 쐐기를 박는다.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고전 11:16)
초대교회 시대에는 머리에 관련된 정확한 표준이 지켜져 왔으나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 모본은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사도는 이 문제에 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고전 11:13-15)
그러므로 사도는 말하기를 ‘남자에게 긴 머리는 부끄러운 일이나 여자에게는 영광이로다’라고 나타내셨다.
어떻게 오늘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이 명백한 지시를 무시할 수 있는가?
‘긴 머리는 여자의 영광’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그들의 머리를 마치 남자들의 머리처럼 짧게 자를 수 있는가?
어떻게 시온의 파숫꾼들 이라고 하는 자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묵인하고 유행을 따를 수 있는가?
긴 머리가 바로 머리를 가리는 덮개를 대신하여 제시하신 사도바울의 권고이다.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긴 머리를 하는 것은 여성들의 신중함과 겸손함을 나타내는 고대 여성들이 머리를 가리는 덮개를 대신하는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순종해야할 표준 모델인 것이다.
이와 같은 표준과 원칙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신 유행을 따라서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흑인들의 머리처럼 퍼머를 하는 것은 말씀에 의해 강한 질책을 받아야한다.
현란한 물감으로 머리를 염색하여 동 서양의 분간을 없애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세상의 유행이 교회에 용납되는 일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모든 행위들은 유행의 여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고안된 사단의 계획이다.
겸손과 거룩함을 좇으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과시나 시선을 끌기 위해 옷을 입고
머리를 단장해서는 안 되며 외모는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를 제시하기 위해 단정하고 위엄이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각 시대마다 여성의 머리를 꾸미는 일은 유혹의 근원이 되어왔으며 영적 표준이 낮아진 오늘날에는
유행의 위력은 더욱 그리하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은 남자들조차도 너무나 머리에 대한 유행에 대해서 민감하다.
예배하는 집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입고 꾸민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입고 꾸민다.
그들은 외적 치장과 화려한 장식들로 경배자들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그 하찮은 물건에 이르게 함으로 하나님을 매우 불쾌하시게 한다.
"하나님이 생각의 주제가 되고, 예배드리는 자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엄숙하고 거룩한 예배에서
마음을 빼앗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건 하나님께서는 불쾌히 여기신다."(5증언, 499)
"나는, 밖으로 나타난 모습은 마음의 상태를 보여 주는 일임을 보았다.
외부에다 리본과 깃과 쓸데없는 장식들을 달고 있을 때, 그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속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런 사람들이 그들의 부패에서 정결해지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1증언, 13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원하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누구나 이 거룩한 훈계에 따를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세상 속에 섞여 살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들 중에서 나와 따로 있고”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확실하다. 이 말은 세상의 풍습과 습관들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모자나 옷을 사야할 필요성을 느낄 때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과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생명의 향기가 되던지 아니면 사망의 향기를 끼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는 일에 성령의 지혜를 내려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고 우리의 감정이나 점원의 달콤한 말에 맹목적으로
끌리지 않고 오직 굳게 원칙을 따르겠다는 결정을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하기에는 너무 보잘것없는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주님 앞에 내어 놓으라 그분께서 좁은 길을 보이시리라’고 말씀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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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청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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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독자들이시여, 여러분들은 유행의 추종자들이
마귀에게 얼마나 큰 희생을 바치는지에 관해 한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유행이 어머니와 딸들의 마음을 사로잡음으로 얼마나 자주 모든 가족들의 건강을 앗아갔는가?
급변하는 유행에 발맞추기 위해 돈과 시간이 무제한으로 투자 되었다.
이 세상에 만연한 이 우상에게 바쳐진 시간과 돈들을 한번 계산해 보자.
얼마나 많은 날들이 유행하는 옷을 찾기 위해 쇼핑하는데 바쳐졌는가?
궁핍한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의 사업을 도움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도 있었던 얼마나 많은 돈들이 쓰여 졌는가?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사업이 헌신을 호소할 때, 사단은 그 마음들을 다스린다.
이러한 사업에는 주먹을 꽉 쥐고 가능한 한 조금씩 헌신하려 하면서도 그들의 장식과 이기적인 보화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구주께서는 우리의 생애에 절약을 실천하기를 원하시지만 주님의 사업을 돕는 일에 있어서는 관대해 지기를 바라신다.
"그들의 동료 인간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이끌기 위한 열렬하고 잘 지도된 노력을 하는 가운데서 그들은
주님 안에서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지상에서 의를 실천함으로 그들은 하늘 나라에서 영생의 상급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자매들의 특권이다.
그러나 그들이 쓸데 없는 의복의 과시에 하나님의 시간과 돈을 쓰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그들이 첫 번째의 네 계명 뿐 아니라 두 번째의 여섯 계명도 깨뜨리고 있다고 그들에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경배의 최고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뿐 아니라 그들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4증언, 632)
아래의 화잇 자매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한가지의 교훈을 받을 수 있다.
“몇해 전, 유럽에서 우리의 사업이 제일 처음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몇몇 자매들은 나를 위해 큰 친절을 베푸길 원했으므로 45달러의 비싼 미국 실크코트를 내게 사 주었다.
그때는 마침 앤드류 형제가 유럽에서의 우리의 사업을 위해 사용할 돈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옷을 50달러에 팔아서 그 돈을 우리의 사업에 쓰여 지도록 앤드류 형제에게 보냈다.
그것은 매우 적절한 시간에 매우 유익하게 쓰여 졌고 나는 무척 감사했다.” 원고3, 18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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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아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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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께서는 우리에게 재능들을 의탁해 주셨는데 그것들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기를 바라신다.
이세상의 어떤 보화나 금, 은보다 더 귀중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잘 다루는 재능이다.
우리 모든 개개인에게 있어서 지금의 때는 은혜의 시간이요, 자비의 시간, 그리고 특권의 시간이다.
천사들은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에 관해 충실히 기록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것에 관해 답변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다시는 되돌릴수 없는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남녀에 의해 낭비되었는가?
아래와 같은 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는가?
1. 하는 일 없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과 오락, 쓸데없는 대화 등을 듣는 일은 세상의 영이 집안에 들어오도록 하는 통로가 된다.
2. 범죄를 불러일으키는 텔레비전. 유익주지 못하는 컴퓨터게임 및 인터넷사용 (경마나 ‘시야를 어지럽게’하는 모든 종류의 스포츠 등도 이에 속한다.)
3. 소설이 담겨 있는 문학 작품이나 무익한 책들은 영성을 저하시킨다.
"그대들이 거울 앞에 서서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머리를 단장하는데 보내는 시간은 기도하고 마음을 살피는데 바쳐져야 한다.
성화된 마음에는 외적 장식을 위한 여지가 없고, 내적 장식 곧 하나님의 영의 열매인 그리스도인 덕성을 얻고자 하는 간절하고 열렬한 소원이 있게 될 것이다."
(1증언, 162)
거의 모든 시간은 이러한 일들을 위해 바쳐졌으나 슬프게도 우리의 빈약한 영혼은 경시 되어왔다.
기도와 성경연구로 하나님을 구하는 일에는 얼마나 적은 시간이 바쳐졌는가? 조석 예배는 잊혀졌다.
진리를 증거 하는 가장 중요한 임무는 뒷전으로 밀려졌다.
어떻게 그런 자들이 은혜와 미덕 가운데서 자라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할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런 자들이 교활한 원수의 유혹앞에 담대히 서기를 기대할수 있겠는가?
충분한 준비가 없이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접해야 할 마지막 시험의 때에 설 수 있겠는가?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 5:19-21)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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