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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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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 29:29, 30)
인간들은 끝임 없이 오묘한 일에 대한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는 유혹을 받아왔다.
태초에 갓 태어난 인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단의 유혹에 너무도 쉽게 반응하였고 미혹 당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무엇인가 있을 법한 비밀에 대하여 알고 싶었던 것이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의 지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엄마 어떻게 아기가 배속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어디로 아기가 나와?' 라고 질문하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질문에 어머니들은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을 몰라 당황할 때가 있다.
그것은 대답할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아이는 그의 지력이 그런 문제들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의 신성문제를 연구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유한한 인간의 지력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지식이 있다는 것과 아직 밝히지 아니하시고
설명하지 않으신 말씀에 대하여 추측과 설명을 하려고 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밝혀진 지식과 나타난 일을 아는 일은 우리의 특권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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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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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가 연구 하고자 하는 소위 신학적인 용어로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말씀을 연구해 보기로 하자.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말하고 있는 삼위신성의 논란은 그 기원이 십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아직도 이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사단의 함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미 기독교계에 알려진 신성문제로는 유일신론과 삼신론, 삼위일체론이 있다.
유일신론: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아들 예수님과 성령의 신성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유니태리안주의와 아들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하되 피조(창조에 의함)된 신이요
성령의 존재와 개체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있다. (“여호와의 증인”교회가 그 대표이다.)
삼신일체론:
이교도들이 믿는 다신교적인 삼신론과는 달리 소위 기독교계일각에서 말하는 삼신일체론이 있다.
기독교계일각에서 말하는 삼신일체론은 세 하나님의 곧 성부 성자 성령님의 이름은 주장하나 실제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은 한 분(한 개체)이라는 것이다.
한 분의 신성이 구약에는 아버지로 신약에는 아들로 지금은 성령으로 인간에게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은 예수님을 극악한 기만자요 사기꾼이요 인기 있는 연극배우로 전락시킨다.
그 이유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눅 22:42-44)
“제 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4)
이제 말씀을 생각해보자.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요 성령이요 아들이라면 겟세마네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기도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절규는 무엇인가?
누가 누구에게 하는 기도이며 절규였던가? 기만이요 사기극이요 연극이다.
우리들의 구원이 이런 사기극의 주연배우에 의하여 이루어 질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련한 존재이며 우리가 믿는 믿음의 소망은 어디서 찾을 것이며 무슨 소망이 있는가?
삼위일체론:
정통 기독교계에서 믿고 있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이다.
세분의 개체는 존재하시나 동일하게 한 분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러지는 성경의 말씀 그대로를 믿고 있는 것이다.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겸손한 그리스도인은 말씀대로만 믿고 있다.
억지로 설명하려고 추측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줌의 흙에 불과한 자신이
무한하신 신성의 본질을 이해하기에는 지력이 감당치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성경도 세분의 존재가 계심을 말씀 하셨으나 많은 부분을 신비로 남겨 놓으셨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자칭그리스도인 들에 의하여 지존하신 하나님의 위상이 한갓 인간의 연구 대상이 되어
그분의 명예와 신비하신 그분의 아가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으로 격하 되어버렸다.
삼위일체란 신학적인 용어를 이용한 많은 잘못된 견해들이 있기 때문에
구태여 신학적인 삼위일체란 용어를 사용하는 문제로 필요 없는 논쟁에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삼위일체를 몸은 하나요 머리가 셋이 달린 괴물로 말하는 자들도 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살아 계심을 믿으면 될 것이다.
인간들의 호기심
삼위 하나님의 대한 인간들의 호기심은 매 시대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의구심을 일으켰다.
하나님의 오묘에 속한 것들을 알려고 하고 설명하기 추측과 가정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사단의 올무에 빠지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와 지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삼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개체를 부인하려든다. 왜냐하면 결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한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할 수없고 모든 것을 알 수 없기에
더욱 위대하신 분이요 인간들의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소위 삼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리들 중에는 고대 ‘아리우스주의’파와 같이 신성의 2위이신 예수님을 창조되신 신이라고 믿는 자들이 있다.
반면 또 다른 자들은 예수님을 아버지가 낳으신 혈연관계의 아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서 아버지는 시작이 없으나 아들은 태어난 시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령의 존재는 계시지 않으며, 아버지와 아들의 능력 및 감화력, 영으로 생각한다. 과연 이들의 주장이 진리인가?
이 모두는 오묘에 속한 하나님의 본성과 비밀에 속한 것들을 억지로 풀려고 하는 인간들의 교만과
인간들의 호기심을 이용하여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의구심을 일으켜 인류의 조상으로 하여금 범죄 하게 하였던 사단의 계략에 빠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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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의 제이위가 되시는 그리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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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원성과 여호와 하나님이 되심을 부인하려 든다.
마치 예수그리스도는 성부하나님의 혈육의 아들로서만 설명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데 그렇게 설명한다면 모든 의문은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더 나아가 수많은 의문과 추측을 낳게 하며 무수한 이론들을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들을 성경은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이
그런 모든 인간들의 추측들을 일소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란 말씀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을 말씀하신 것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적용하신 말씀들이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8)
“…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계 1:17)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 22:13)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로서 시작도 끝도 없다고 증거 한다.
어떻게 창조 되신 신이라고 하겠으며 성부하나님의 혈육의 아들 으로써만 간단히 설명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견해들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분명 존재의 시작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에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어떻게 낳으셨는지 설명하려 들지 않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시작과 끝이 없고’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이신지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설명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다만 그렇게 믿을 뿐이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그리스도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이란 ‘스스로 있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있는 자’란 말씀 자체를 우리 인간들이 해석하고 설명 할 수 없다면 예수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하여도 설명하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스스로 존재’한다는 말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3-14)
다음의 성경 절을 대조하여보면 예수님은 분명 여호와하나님이심이 확실하다.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11)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2, 3) 요1:14.참조하라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은 여호와이시다. 그런데 그분을 요한은 예수님이시라고 고 증거하고 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여호와로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3, 14)
예수님이 구약에서는 여호와로 인간들에게 나타나셨음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스스로계시는 여호와이신데 어떻게 시작이 있겠는가?
다음의 말씀들을 계속하여 대조하여 보라 분명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확신할 수 있다.
(시 7:8; 말 3:1-5 = 요 5:22) 여호와가 심판주이심 = 모든 심판은 예수님이 하심.
(시 23:1 = 요 10:11) 여호와 선한목자 = 예수님이 선한목자이심.
(사 44:6 = 계 11:8, 17; 22:13) 여호와가 처음과 나중 = 예수님이 처음과 나중.
(사 40:10 = 계 22:12) 여호와께서 상급을 주심 = 예수님이 상급을 주심
(사 43:11 = 행 4:12) 여호와가 구원자이심 = 천하인간에게 오직 예수이름만이 구원을 줌
(사 40:3 = 마 3:3) 외치는 자의 소리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함 = 외치는자 침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함
성경 가운데는 예수그리스도는 아버지하나님과 차별되는 많은 말씀들이 있다.
그러므로 의문점이 있는 말씀을 찾으려면 많은 것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오묘에 속한 말씀들을 좁은 인간의 식견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는 실수를 하고 있다.
누구나 성경을 읽노라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동등에 대하여 의문을 안 가져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 나아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유한한 인간의 두뇌가 감당할 수 없는 차원의 지식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설명되어 있지 않은 말씀을 구태여 설명하려고 추측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아들이기에 아버지보다는 연하이며 시작이 있다는 설명은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지 않은
위험한 생각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영원성과 자존하심에 대한 많은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시작이 없으신 영원 자존하신 분인 그리스도의 신성의 위상을 함부로 격하시켜 버리는 실수를 했다고 생각해 보라.
이런 경우에,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그분의 영원성과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되신다는 말씀에 우선적인 비중을 두어야 한다.
그 다음에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하여 연구해야 하며 말씀과 말씀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말씀에서 조화를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은 오묘로 남겨 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겸손일 것이다. 영원한 우리의 본향에서 연구할 주제로 남겨 놓아야 한다.
하나님의 신성을 모두 알기 위해서는 그분과 대등한 지혜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분이 항상 우리에게 오묘하신 분으로 계심이 그분을 더욱 존경할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5)
사단의 제안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하나님과 같이”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같지 않고서야 어떻게 피조물이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영원한 세계를 살아가면서 지혜와 지식이 증가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항변할는지 모른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라고 하셨지 않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스스로 계신 분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아들이 될 수 있는가?' 라고 흑백 논리를 제시할는지 모른다.
기억해주기 바란다. 결코 예수님이 스스로 계신 분이기에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이면서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것을 입증하라고 한다면 성경에 나타내지 않은 것을 억지로 설명을 하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영원함과 시작과 끝이 없으신 신성의 신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 29:29,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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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의 삼위이신 성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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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의 삼위이신 성령에 대한 주제를 연구하기 전에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말씀이 있다. 성령의 본질은 오묘이다. 사람들은 성령을 설명할 수 없는데, 이는 주께서 인간들에게 성령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상적인 견해를 가지고 성경절을 모아 거기에 인간적인 해석을 가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한다면
결국은 빠져나오지 못하는 미궁에 빠질 것이다.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깊고 오묘에 관하여는 침묵이 금이다.
다수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성령의 존재는 계시지 않는다는 주장을 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서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여질 뿐 결코 인격적인 개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바람, 불, 물, 소금, 만나, 호흡, 인, 기름, 손가락, 영, 눈, 음성, 보증인, 비둘기,
비, 이슬 등 많은 모양으로 나타내셨다. 잘못 생각하면, 성령은 마치 인격적인 존재자가 아니요,
비인격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성령의 존재 자체를 부인해 버리는 견해들이 나온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성령의 본질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 아니요 그분의 하시는 사역을 은유나 비유로 나타내신 것이다.
그분의 능력과 하시는 사업이 바람, 물, 불, 비둘기처럼 역사하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같이 그분의 하시는 사역과 능력을 상징하기 위하여 사용된 말씀을 성령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처럼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성령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그들의 주장을 말씀으로 시험해보자.
시금석-성경 말씀과 모순됨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마 28:19)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7, 8, 13)
성령께서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요 개체가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이름이 주어지고
인칭대명사인 ‘그가 와서‘ 또는 ’그를 보내리니‘ 존칭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일종의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결코 성령님이 하나님의 능력과 감화력에 불과한 존재라면 성경은 예수님이 친히 성령의 이름으로 거룩한 침례예식을 거행하도록 명령하시고
성령을 일컬어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시겠다고 하시면서 자신이 계속 땅에 계시는 것보다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하실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분명히 성령을 또 다른 한분의 인격체로 말씀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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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도 여호와하나님이 되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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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성령하나님에게도 여호와하나님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음을 찾을 수 있다.
다음의 말씀을 관심 있게 비교 연구해보라.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9, 10)
여호와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사 6:9, 10)라고 하셨다 .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사야에게 말씀하신 여호와는 곧 ‘성령’이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사도바울의 말씀을 읽어보라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행 28:25-27)
이 말씀들을 비교 하여 볼 때 성령은 여호와가 되심을 알게 된다.
성령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스스로 존재하고 계시는 성령의 존재와 개체를
부인한다는 것이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며 그렇게도 쉽게 단정 지을 수가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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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인격체로 존재하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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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 감정, 의지, 말하심, 중보, 증거, 모욕을 느낌, 속임 당함, 훼방 당함, 증인 등은 인격자만이 소유할 수 있고 경험 할 수가 있다. 성령이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요 개체가 없으시다면,
인격이 없는 돌부처를 인격자로 섬기는 우상 숭배자와 같다.
비 존재자를 인격자로 존경하고 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성령을 무형의 우상으로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음의 말씀들을 상고하여 보라.
고전 2:10 -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롬 8:26 -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15:30 -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고전 12:11 -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행 16:6 -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요 14:26 -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요 15:26 -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딤전 4:1 -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행13:2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히 10:15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히 10:29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행 5:3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마 12:31 -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마 12:32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요 3:5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성령님의 감동과 위로, 회개케 하심과 의를 깨닫게 하심에 대하여 얼마나 성령님께 감사하고 있는가?
그분에 대하여 감사와 사랑을 느끼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존재를 없애 버리기 전에
그분의 “영원하심”과 “여호와가 되심”에 대하여 먼저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분에 대한 오묘한 신비에 대한 불신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히려 그분의 오묘하신 까닭에 여호와(성령)의 거룩하심을 보았던 이사야 선지자처럼 엎디어 경배하고 싶어질 것이다.
“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5-7)
카톨릭 진리가 아님
많은 사람들은 삼위하나님의 교리는 천주교회의 교리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삼위하나님의 존재를 가장 명확하게 말씀하신 예수님 자신에 의하여 밝혀진 진리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마 28:19)
구약성경에는 삼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항상 여호와 하나님으로 모두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확실하게 삼위의 존재를 밝히신 것이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삼위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말씀들이 없지 않았다.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3)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계 4:8)
이사야 선지자와 요한이 계시중 하늘지성소를 보았을 때 천사들이 창화하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고 외쳤다.
세 분의 거룩하신 분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창조의 역사 중에서도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 ‘우리’ 라는 표현을 세 번이나 사용하심으로 삼위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삼위 하나님의 존재를 비록 천주교회가 가르친다고 하여서 진리가 오류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100%의 오류만을 가르치는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99%의 진리에다 1%의 오류를 섞어놓은 경우가 더 위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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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신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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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 6:4)
이 말씀을 이용하여 사단은 많은 사람들을 오류로 인도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참으로 영원하시고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며 아들은 아버지와 무엇인가 다르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 역사하는 하나의 비존재자라는 결론을 내려 버린다.
이와 같은 결론은 당장에는 유한한 인간의 이해력을 만족시켜 주긴 하지만 사단이 던진 미혹의 화살을 맞았던 하와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는 한분의 여호와는 누구이신가? 하는 의문점을 연구해 보자.
히브리어로 ‘하나’를 표시하는 단어로 두 가지 용어가 사용된다. 에하드(ehad)와 야히드(yahid)이다.
에하드:
한 개 이상의 개체가 연합하여 하나의 단위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로서 하나의 복합적인 단위라 할 수 있다.
창 2:24을 보면 아담과 하와는 별개의 개체이지만, “둘이 하나의 몸”이 되라고 하셨을 때 사용된 ‘하나’라는 단어가 에하드이다.
야히드:
이 단어는 절대 단수 글자 그대로의 하나, 곧 유일한(only)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된 예를 성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신 6:4의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라는 하나의 단위는 절대 단수인 야히드가 아닌 에하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절대적인 한분의 개체인 의미로 생각하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세 분은 하나(에하드)라고 말하고 있다. 계획과 목적과 뜻이 완전한 연합과 조화를 이루어 행동하시며
불일치라는 것은 이 분들에게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혹의 땅에서 속히 떠나라
하와는 에덴동산을 거닐다가 어느 사이에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 나무가 있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는 한 음성을 듣게 되었고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2-5)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는 말씀과는 모순되는 말을 들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점을 발견했을 때 그는 유혹자의 음성임을 깨닫고 급히 유혹의 땅에서 떠나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감히 유혹자와 함께 담화하였고 결과적으로 미혹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유혹의 땅에서 속히 떠나라고 권고하고 싶다. 삼위하나님의 개체와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분명 말씀과 모순되는 가르침이다. 더 이상 유혹의 장소에서 머뭇거린다면 하와와 같은 운명에 빠지고 말 것이다.
필경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계속하여 유혹자와 담화를 계속한다면 처음 들었을 때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유혹자의 말이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도 보이고 그래서 그 말들이 믿어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만이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유혹의 열매는 자신의 남편에게도 주어먹게 한 후에야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삼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기별에 관심을 버려야 한다.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권고한 말씀에 유의하자: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딤전 6:20,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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